오늘은 하우스 앞 텃밭 구역을 다시 설계했다. 계절이 바뀌고, 작형이 전환되는 시점이 오면 나는 늘 이 시간을 가장 기다린다. 단순히 작물을 바꾸는 게 아니라, 밭 전체의 ‘화면’을 다시 구성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종 농사를 예술처럼 느낀다. 씨앗을 고르고, 모종을 심고, 고랑과 고랑 사이의 간격을 정하고, 어느 색이 어느 자리에 위치할지를 고민하는 순간, 마치 빈 캔버스를 앞에 둔 화가처럼 마음이 설렌다. 단순히 먹거리를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의 살아 있는 ‘풍경’을 구성하는 일. 그리고 그 풍경을 바라보는 나는, 분명 흙을 만지는 농부이자, 동시에 자연을 통해 그리는 조용한 예술가다.
그 감정을 처음 느낀 건, 작년에 혼합재배를 시도했을 때였다. 빨간 머스타드, 연두빛 상추, 진한 보라색 적근대, 그리고 중앙에 루꼴라를 배치했다. 처음엔 단순히 품종의 다양성을 고려한 결과였지만, 막상 작물이 자라기 시작하자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이 멎는 듯했다. 각기 다른 색의 잎들이 파도처럼 퍼졌고, 잎의 결과 높낮이가 만들어낸 입체감이 마치 화단처럼 느껴졌다. 손님들이 방문했을 때도 가장 먼저 “우와, 이건 진짜 예뻐요. 먹기 아깝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반응이 좋았다. 먹는다는 건 생명을 소비하는 일이지만, 그 전에 시선을 사로잡는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그 생명을 존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농장의 작물 배치에 ‘미감’을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색의 조화, 잎의 결, 키의 균형, 광 투과의 방향까지. 일종의 디자인 설계였다. 바질을 중심으로 좌우에 상추와 청경채를 배치하고, 주변에 캐모마일과 타임을 심었다. 기능적으로는 해충 방지와 작물 생육 향상을 위한 동반식재였지만, 동시에 그 모습 자체가 마치 한 폭의 정원 같았다. 그러다 보니 작업이 단순히 노동이 아니라 창작처럼 느껴졌다. 이쪽에 조금 더 붉은 색이 필요할까, 이 고랑은 줄기가 직선형보다 곡선형이 좋을까, 빛이 이 방향으로 들어오니 노란빛 작물을 넣자. 마치 회화의 구도를 짜듯, 나는 흙 위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른다. “농사가 무슨 예술이야. 먹고사는 일이지.” 물론 맞는 말이다. 농사는 현실이고, 생계고, 노동이다. 하지만 그 안에 예술이 없다는 법은 없다. 예술은 고가의 화구나 캔버스가 아니라, 마음으로 빚어낸 질서와 조화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흙 위에서 만들어지는 생명의 조화는 그 어떤 회화보다도 복잡하고 섬세하며, 때로는 놀라운 감동을 준다. 그것을 매일 마주하는 나는, 단지 작물을 키우는 사람을 넘어, 자연과 협업하는 예술가이기도 하다. 흙은 내 캔버스이고, 씨앗은 내 팔레트이며, 계절은 내 붓이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재료를 빌려 잠시 ‘한 시절’을 표현할 뿐이다. 올봄에는 특별히 채소꽃밭을 조성해보고 있다. 수확용 채소가 아니라, 일부러 꽃대를 올려 자연스럽게 개화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바질꽃, 루꼴라꽃, 무순꽃, 브로콜리꽃. 이 작물들은 꽃을 피울 때도 독특한 매력이 있다. 자잘하지만 섬세하고, 각각 다른 향을 품고 있다. 그걸 하우스 앞쪽 한 모서리에 모아뒀더니, 벌과 나비가 몰려들기 시작했고, 농장에 작은 생태공원이 생긴 느낌이 들었다. 아침마다 그곳을 돌며 사진을 찍는 게 요즘의 소확행이다. 나도 모르게 구도를 잡고, 빛을 보고, 색을 정리한다. 누군가에게는 비효율일지 몰라도, 이 감각은 내게 농사의 깊이를 더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감성 없는 농사는 메마르다. 마치 감정 없는 요리처럼. 아름다움은 사치가 아니라 지속 가능성을 위한 윤활유다.
오늘도 작물을 심으며 한참을 고민했다. 이 파란색이 이 자리에 너무 튀지는 않을까. 루꼴라 잎의 구불거림이 이 구역에 생동감을 줄까. 청경채의 짙은 녹이 중심을 잘 잡아줄까. 그러고 나서 손으로 흙을 다지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노동이 아니라, 나만의 전시회 준비다.’ 계절마다, 밭마다, 날마다 달라지는 이 농장의 풍경은 어쩌면 매번 새로운 테마를 가진 자연 전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전시의 큐레이터가 바로 나다. 관람객은 없지만, 나 자신이 매일 그 풍경을 다시 보며 감탄하고, 또 실망하고, 다음을 준비한다. 해 질 무렵, 하우스에 붉은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바람이 불자 상추 잎이 흔들리고, 그 사이로 잎맥이 반짝였다. 나는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것은 말 그대로 ‘움직이는 정물화’였다. 손끝으로 만든 결과물, 하지만 내가 의도하지 못한 자연의 완성. 그 안에서 나는 예술가이면서도, 동시에 관객이 된다. 농사는 그렇게 날마다 표현하고, 날마다 감상하고, 날마다 배우는 예술의 연속이다. 그래서 나는 내일도 다시 흙 위에 손을 얹는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계절을, 또 한 편의 그림을, 조용히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