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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면 농부는 쉰다’는 말의 진실과 오해

by 519kiki 2025. 5. 25.

오늘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침부터 촉촉하게 뿌리기 시작하던 빗방울은 어느새 장대를 이루더니, 정오가 넘도록 멈추지 않았다. 하우스 안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진흙탕이 되었고,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물에 고무장화를 신었음에도 바지가 젖었다. 작물은 고요했다. 물방울이 잎을 타고 흘러내리고, 하우스 비닐 위로 쿵쿵 떨어지는 빗소리가 농장 전체를 덮었다. 그 순간 문득 떠올랐다. “비 오는 날은 농부도 쉰다”는 말. 어릴 적 도시에서 살던 나는 그렇게 들었고, 정말 그렇게 믿었다. 농부는 비 오는 날 밭에 안 나간다고, 비가 오면 의자에 앉아 막걸리 한잔 하며 쉬는 거라고. 그런데 지금 이렇게 빗속을 헤치고 하우스를 돌고 있는 나를 보면, 그 말은 얼마나 순진한 오해였는지 새삼 느껴진다. 농사를 시작하고 가장 먼저 깨달은 건, 비 오는 날은 ‘쉴 수 있는 날’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친환경 농사를 지으며 알게 된 건, 작물은 비 오는 날에도 자라고, 병도 퍼지고, 하우스 안 온습도는 평소보다 더 민감하게 요동친다는 사실이었다. 비가 오면 야외 밭 작업이 불가능하다는 건 맞다. 흙이 젖고,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고, 작물 수확도 어렵다. 하지만 하우스 농부에겐 비 오는 날이 곧 ‘긴장의 날’이다. 공기 중 습도가 올라가면 곰팡이성 병해가 활성화되고, 환기구 관리가 소홀하면 하우스 내부가 눅눅해져 작물 잎이 썩는다. 실수 한 번이면 몇 주, 몇 달 공든 작물이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그래서 오히려 더 부지런히 움직인다. 환기창을 열고, 이중커튼을 조절하고, 바닥 물기를 확인하고, 병해가 생기지 않도록 방제 스케줄을 다시 검토한다.

이런 날엔 특히 ‘감각’이 중요하다. 데이터로는 습도 85%, 온도 22도라지만, 막상 하우스 안에 들어가면 체감은 또 다르다. 뿌리 쪽을 살펴보면 물이 고이기도 하고, 수분이 증발하지 않아 작물이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듯 잎이 처진다. 눈으로는 안 보이는 병의 기운이 서서히 작물 속에 파고드는 게 느껴질 때도 있다. 그래서 나는 빗소리가 들리면 자동으로 긴장이 된다. 특히 여름철 장마기나 가을 태풍 전후엔 하루 종일 하우스를 지켜야 한다. ‘비가 오니 쉴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비가 오니 더 지켜야 한다’가 맞다. 물론 쉴 틈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밭일이 불가능한 만큼 사무 업무나 농장 정리, 비품 점검 같은 일들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한 쉼이 아니다. 늘 긴장 속에서 ‘무엇을 더 대비해야 하는가’를 묻는 시간이다.

벼를-심고-있는-농부-사진

 

물론, 비 오는 날이 주는 감성도 있다. 하우스 한가운데 앉아 비닐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을 때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잔잔해진다. 평소엔 바람 소리, 기계 소리, 발자국 소리로 가득했던 농장이 오롯이 빗소리 하나로 채워지는 그 느낌. 그건 도시에서 경험하기 힘든 고요함이다. 그리고 그 순간엔 나 역시 작물처럼 조용히 ‘자라고’ 있는 기분이 든다. 어쩌면 그런 의미에서 ‘비 오는 날은 쉰다’는 말은 단순히 육체의 쉼이 아니라, 마음의 쉼을 뜻하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자주 말하는 ‘농사의 감성’은 바로 이런 순간에 싹튼다. 젖은 흙냄새, 비 내리는 풍경, 물에 젖은 잎들의 무게, 이 모든 것이 내 마음에 작은 휴식을 준다. 비 오는 날은 생각이 많아진다. 언제나 반복되는 날씨일 뿐인데, 이토록 감정이 깊어지는 이유는 아마도 자연 앞에서 겸손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농부는 날씨를 바꿀 수 없다. 다만 준비하고 대응할 수 있을 뿐이다. 비가 온다고 한탄할 수도 없고, 비가 안 온다고 무조건 반길 수도 없다. 가뭄과 홍수, 바람과 안개, 모든 날씨는 내 계획과 무관하게 흘러간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며 가장 먼저 배우는 건 ‘기다림’과 ‘수용’이다. 비 오는 날은 그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는 그저 땅을 다지고, 환기창을 조절하고, 작물 옆을 지킬 뿐이다. 비가 내리는 동안에도 작물은 자란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오늘을 허투루 보낼 수 없다. 저녁이 되어 비가 잦아들었고, 하우스 안의 습도도 조금씩 내려갔다. 바질 잎에는 여전히 물방울이 맺혀 있었고, 상추는 힘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 잎을 하나하나 닦아주었다. 쉴 수 없는 하루였지만, 그 와중에도 묘하게 위로받은 날이기도 했다. 비는 농부를 시험하지만, 동시에 다시 농부로 만들어주는 존재다. 그 흐름에 몸을 맡기면서도 균형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바로 그게 지금의 나다. 그리고 그런 나를 한 발짝 뒤에서 지켜봐주는 비가, 오늘은 이상하게도 반갑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