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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 난 양액기 앞에서 배운 문제 해결력

by 519kiki 2025. 5. 18.

오늘은 하루 종일 양액기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한참 작물 생장 속도가 올라갈 무렵이라 양액기 관리는 하루도 빼먹을 수 없는 작업 중 하나다. 그런데 오늘 아침, 여느 때처럼 스마트팜 시스템을 확인하다가 수분 공급 그래프가 비정상적으로 꺾여 있는 걸 발견했다. 처음엔 센서 오류겠거니 하고 넘기려다가, 기분이 이상해 하우스로 직접 들어갔다. 양액기 쪽으로 가보니, 압력이 약해졌다. 정확히 말해, 양액은 분배되고 있었지만 균일하지 않았고, 일부 라인에서는 거의 공급이 멈춘 상태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이건 단순한 고장이 아니었다. 조치가 늦어지면 지금 막 자라기 시작한 작물 전체에 큰 피해가 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밭에-약-치는-사람-사진

 

양액기의 수조 앞에 앉아 멍하니 5초쯤 있었던 것 같다. ‘왜 하필 지금?’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곧 바로 ‘지금 대처하지 않으면 내일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에서 위기는 예고 없이 오고, 그 순간의 대응력 하나로 모든 결과가 달라진다. 수조 밸브, 급수 필터, 배관 연결부, 센서, 전원 상태까지 하나하나 점검하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전자기기나 배관 기술에 전문가가 아니다. 하지만 농사를 지으면서 자연스럽게 터득한 건, ‘기술을 몰라도 문제는 반드시 내 손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농장에서 발생하는 고장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맡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대개는 바로 현장에서, 그 자리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그래야 작물이 살아남고, 농장이 굴러간다. 한동안 필터를 뜯고 배관을 살피다가, 문제의 원인을 찾았다. 일부 미세 필터에 이물질이 껴 있었고, 압력 조절 밸브의 고무 패킹이 살짝 찢어져 있었던 것이다. 평소보다 자주 양액을 갈아줬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지난주 강풍 때 먼지가 더 많이 들어왔던 것일까. 원인을 정확히 추정할 수는 없었지만, 문제는 분명해졌다.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장 난 부품을 당장 교체하거나 임시 우회로를 만들어야 했다. 다행히 창고에 여분의 고무 패킹이 있었다. 공구 상자를 열고 망설임 없이 분해에 들어갔다. 땀은 줄줄 흘렀고, 고무장갑은 금세 젖어버렸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작물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몇 시간이라도 물을 제대로 먹지 못하면 바로 시들어버린다. 내 손에 모든 책임이 달려 있었다. 2시간 반 만에 양액기 임시 복구를 마쳤다. 시스템을 재가동하자, 천천히 라인마다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상추 줄기에서 물방울이 흘러나오는 걸 확인한 순간, 깊은 한숨이 터졌다. 이 조용한 작업 하나가 얼마나 긴장을 요했는지, 그제야 몸이 풀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전체 라인을 점검하고, 정상 작동을 확인한 뒤에야 잠시 트럭 안으로 들어가 물 한 모금을 마셨다. 손끝은 얼얼했고, 다리는 풀려 있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나는 지금 내 농장을 지켜냈다. 그리고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스스로가 대견했다.

 

돌이켜보면 농사를 시작한 초창기에는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왕좌왕하곤 했다. 무조건 A/S부터 부르고, 마을 어르신께 도움을 요청하고, 유튜브를 뒤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쌓이면서, 나는 어느 순간부터 문제를 ‘해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문가가 아니어도 된다. 중요한 건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들여다보는 태도, 그리고 끝까지 손을 놓지 않는 끈기다. 오늘처럼 작물 하나하나가 내 손끝에 달려 있다는 걸 알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나는 그 과정을 통해 내가 얼마나 더 성장했는지를 매번 체감한다.

양액기는 그저 물과 영양제를 섞어주는 장비일 뿐이다. 하지만 오늘 그 기계 앞에 앉아 있었던 나는 단순히 기계를 고치고 있었던 게 아니다. 나는 내 농사의 생명줄을 붙잡고 있었고, 동시에 위기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다지고 있었다. 농사는 결국 변수와의 싸움이다. 기후, 해충, 장비, 물류까지 예상할 수 없는 변수들이 매일 찾아온다. 그런 가운데 살아남는 농부는 정보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 ‘문제가 생겼을 때 끝까지 해결하려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온몸으로 배웠다. 해질 무렵, 하우스 앞에 앉아 조용히 작물들을 바라봤다. 아무 일 없다는 듯 고요하게 자라고 있는 상추, 막 물을 받아 들고 힘차게 뻗기 시작한 바질, 처음 뿌리를 내리는 어린 루꼴라까지. 이 아이들은 오늘 나의 문제 해결력을 통해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고장 앞에서,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선택을 했고, 나는 그 선택을 끝까지 지켜냈다. 그 작은 승리가 오늘 하루를 완성했다. 농사는 정직한 기록이자, 끊임없는 대처의 연속이다. 그리고 나는 그 기록에 오늘도 하나의 줄을 더했다. “양액기 고장, 직접 복구 완료. 작물 전량 정상 반응 확인. 나,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