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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농장에서 자란 채소로 식탁을 차리던 날

by 519kiki 2025. 5. 16.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일상처럼 시작한 하루였지만, 아침부터 마음 한켠이 잔잔하게 들떴다. 이유는 단순했다. 오늘 저녁 식탁에 올릴 재료를 전부 내가 직접 키운 작물로만 준비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사실 평소에도 농장에서 나온 채소를 먹긴 한다. 틈날 때마다 상추 한 줌, 루꼴라 몇 장, 방울토마토 한 알씩 따 먹곤 했지만, ‘오늘 식탁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농장에서 자란 것들로만 채워보자’는 결심은 또 달랐다. 농사를 짓는 동안 수없이 많은 사람에게 작물을 팔았고, 누군가의 식탁에 내 채소가 오르는 장면을 상상해왔지만, 정작 내 가족을 위한 온전한 한 끼를 준비해본 기억은 많지 않다. 그래서 오늘은 꼭 그렇게 해보고 싶었다. 하나하나 정성을 담아, 땅에서 바로 건져낸 음식으로 식탁을 꾸며보기로 했다.

수확한-당근-사진

 

오전 6시, 햇살이 퍼지기 전 하우스로 향했다. 이슬에 젖은 잎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질은 이른 아침의 공기를 품으며 특유의 향을 짙게 내뿜고 있었다. 상추는 보기 좋게 잎을 벌리고 있었고, 케일도 한창 여물어가고 있었다. 천천히 고르고 따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이른 아침부터 식재료를 수확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자연스럽고 감사한 일인지.’ 비닐봉지 대신 바구니를 들고, 상추 몇 장, 바질 조금, 방울토마토 한 줌, 어린잎채소를 넉넉히 담았다. 모두 내 손으로 씨를 뿌리고, 땀 흘려 키운 아이들이었다. 그 바구니는 장바구니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난 몇 달간의 시간과 노력, 기다림이 오롯이 담긴 증거였다. 집으로 돌아와 채소들을 하나하나 정성껏 씻었다. 손끝으로 잎을 문지를 때마다, 작물 하나하나에 깃든 생명력이 전해지는 듯했다. 누군가에겐 그저 채소 한 장일 수 있지만, 나에겐 그 잎마다 사연이 있다. 장마철 물빠짐을 걱정하며 하루 종일 배수로를 팠던 기억, 병충해를 막기 위해 새벽마다 일어나 하우스를 돌던 날들, 폭염 속에서 수분을 잃지 않도록 틈틈이 물을 뿌려줬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이 상추 한 장, 바질 한 장에 녹아 있었다. 그러니 이 식재료는 단지 음식이 아니라, 나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제 그 노력이 내 식탁 위에서 하나의 요리가 되려 하고 있었다.

 

점심 무렵, 요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바질을 활용한 페스토 소스를 만들었다. 신선한 바질 잎과 올리브오일, 호두, 마늘을 갈아 만든 소스는 향부터가 다르다. 그 어떤 슈퍼마켓 바질보다 향이 진하고 달콤했다. 방울토마토는 오븐에 구워 껍질을 살짝 벗겼고, 상추와 케일은 찬물에 살짝 담갔다가 물기를 뺐다. 주재료는 직접 만든 비건 파스타와 샐러드였다. 정말 오래간만에 손수 식탁을 차리는 기분이었다. 가족들도 하나둘 부엌으로 모여들었다. “이건 어디서 샀어?”라는 질문에 “우리 밭에서 땄어”라고 말했을 때, 아이들이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은 상추를 뜯어 한 입에 넣더니 “달아!”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그건 너희 아빠 땀맛이야.”

정식으로 차려진 저녁 식탁은 평소보다 화려하지 않았다. 고기나 육수 없이 오직 채소만으로 만든 식사였지만, 이상하리만큼 깊고 풍성했다. 음식을 씹는 내내 작물의 질감, 향, 색이 입 안 가득 퍼졌고, 그것은 단순한 미각 이상의 감각이었다. 이건 내 몸이 기억하는 땅의 맛이었고, 내 손이 길러낸 노동의 맛이었다. 아내는 조용히 밥을 먹다 이렇게 말했다. “이런 밥상, 매일 먹고 싶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내심으로 다짐했다. 매일은 어렵더라도, 자주 이렇게 한 끼를 준비해보자고. 내 손으로 자란 것들을 내 가족의 입에 넣는 일. 그것보다 더 농부다운 일이 어디 있을까.

 

식사를 마친 뒤, 바깥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봤다. 낮 동안 바람에 흔들리던 작물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아이들이 내 가족을 먹이고 있구나.’ 그 사실이 묘하게 울컥하게 했다. 농사는 늘 바쁘고, 늘 고되지만, 그 속엔 이런 순간들이 있다. 수확을 팔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와 내 사람들을 위해 나누는 일. 그래서 나는 오늘이 정말 값졌다고 생각한다. 식탁을 차리는 동안에도, 밥을 먹는 동안에도, 그리고 식기를 정리하며 고요히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순간에도, 내 마음엔 이상할 정도로 잔잔한 기쁨이 머물고 있다. 농사를 지으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땅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수확이 아니라 ‘순환’이라는 것이다. 내가 키운 작물을 먹고, 그 생명력을 내 안에 담고, 다시 땅으로 돌려주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느껴졌다. 오늘 차린 이 식탁은 그 순환의 증거였다. 내가 기른 채소를 내가 먹고, 그 힘으로 내일 다시 씨를 뿌린다. 그렇게 살아간다. 오늘은 밥상이 아니라, 내 농사의 의미를 되새기는 의식이었다. 그리고 그 의식 덕분에, 나는 내일도 다시 농장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