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기억난다. 생애 첫 작물 출하 계약서를 손에 쥐고, 얼마나 기뻤는지를. 마치 농사 인생의 터널을 빠져나온 것 같았고, 수많은 실패와 고된 시간 끝에 드디어 ‘인정받았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 계약서에는 상추, 청경채, 바질을 정기적으로 납품하는 조건이 적혀 있었고, 일정 수량과 단가까지 명확히 명시돼 있었다. 나는 매일같이 재배 환경을 점검하고, 조금이라도 더 좋은 품질로 키우기 위해 더 조심스럽게 물을 주고, 바람을 돌리고, 밤마다 수확 타이밍을 계산하며 잠들었다. 그렇게 한 달 가까이 준비했고, 드디어 첫 출하를 했다. 그런데 그게 내 첫 번째 실패의 시작이었다.
출하 후 3일 뒤, 담당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상추가 일부 물러졌고, 청경채는 시든 게 많았다"는 말이었다. 나로서는 억울했다. 당일 아침에 수확했고, 저온 보관도 했고, 포장도 꽤 신경 썼다. 하지만 그분은 단호했다. "첫 거래라 믿고 받았지만, 이런 상태로는 재계약은 어렵습니다." 전화기를 붙잡고 아무 말도 못했다.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어안이 벙벙했다. 계약이 깨졌다는 말이 채 이해되지 않았고, 왜 그랬는지도 명확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내내 ‘왜?’라는 질문만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하우스 한쪽에 멍하니 앉아 몇 시간이고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들인 시간과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대감’이 허무하게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농사가 ‘키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다. 정성껏 키우면, 좋은 작물을 만들면, 그것이 곧 성공이라 믿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농사도 결국 ‘사업’이라는 걸. 품질이 전부가 아니고, 공급 타이밍, 포장 방식, 물류 대응, 심지어 계약서의 세부 조항 하나하나까지 내가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한다는 걸. 나 혼자만의 감성이나 고집으로는 절대 시장과 대등하게 거래할 수 없다는 걸, 참 뼈아프게 배웠다.
그날 밤, 계약서를 다시 펼쳐보았다. '파손 시 교환 또는 환불 불가', '납품 기준 미달 시 계약 자동 해지' 등 조항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그럴 리 없다’는 낙관으로 대충 넘겼던 문장들. 하지만 사업은 ‘예외’가 아닌 ‘원칙’으로 운영된다는 걸, 나는 너무 늦게 깨달은 셈이었다. 그날 이후, 나는 작물을 키우는 시간만큼 ‘판매 준비’에 시간을 쓰기 시작했다. 단가 계산, 수익률 시뮬레이션, 포장재 선택, 수송환경 테스트, 소비자 응대 매뉴얼까지, 하나하나 직접 연구하고 만들어갔다. 농사를 짓는 손이 아니라, 사업을 꾸리는 눈을 갖춰야 했던 시기였다. 물론 그 과정은 녹록지 않았다. 하우스 정리 후 밤에 자료를 찾고, 주말이면 다른 농가들의 납품방식을 벤치마킹하기 위해 박람회장을 돌았다. 스마트스토어, 로컬푸드 직거래 장터, 소셜커머스 입점까지 도전했지만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기술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던 나는, ‘고객이 무엇을 원하고, 어떻게 판단하는지’를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팔리지도 않고, 피드백도 없고, 점점 자신감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 첫 계약의 실패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날의 분함, 허탈함, 그리고 그 속에서 느꼈던 ‘내가 뭘 모르고 있었구나’라는 자각이 내게 계속 물었다. 포기할 거냐고, 여기서 멈출 거냐고.
나는 결국 포기하지 않았다. 실패의 본질을 마주하기로 했다. 단지 상품을 파는 게 아니라, ‘농장의 신뢰’를 파는 것이고, ‘재배력’이 아니라 ‘경영력’으로 평가받는다는 걸 알게 됐을 때, 나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다. 두 번째 계약은 이전보다 훨씬 작고 조건도 까다로웠다. 하지만 이번엔 단 하나의 실수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임했다. 첫 출하 전날엔 포장 상태를 사진으로 전송했고, 배송 중 온도 데이터를 기록했으며, 도착 직후 상태를 영상으로 남겼다. 그리고 배송 후, 고객사로부터 처음으로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이번엔 정말 완벽했습니다. 장기 계약 논의하고 싶습니다." 그 순간 나는 울컥했다. 단지 계약이 성사돼서가 아니었다. 그 실패를 버티고, 그것을 배움으로 바꾸어 다시 한 걸음 내딛을 수 있었던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농사는 감성으로 시작하지만, 사업은 냉정함 위에 세워진다. 나는 이제 그 두 가지를 모두 품어야 하는 ‘농업인’이다. 손으로 흙을 만지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유통과 수요를 생각해야 한다. 하루하루 작물을 보살피면서도, 고객과의 신뢰를 동시에 관리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를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금도 나는 종종 그 첫 계약서를 꺼내어 본다. 그 안에 적힌 단어들은 그대로지만, 그때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르다. 나는 그 실패 덕분에 농사도 사업이라는 걸 배웠고, 진심만으로는 부족하다는 현실을 알았으며, 그래도 진심이 없으면 오래가지 못한다는 모순 같은 진리를 가슴에 새겼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두 손으로 흙을 만지며 두 눈으로 시장을 바라본다. 농사는 흙에서 시작되지만, 시장에서 완성된다는 걸 알게 해준 그 첫 실패가, 내 농사 인생에서 가장 값진 수업이었다는 걸 이제는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