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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이 내게 가르쳐준 ‘기다림’의 철학

by 519kiki 2025. 5. 21.

오늘도 씨앗을 뿌렸다. 몇 해째 해온 작업이고, 이제는 손이 먼저 움직일 만큼 익숙한 일이지만, 땅에 씨를 뿌리는 이 단순한 행위가 내 마음에 여전히 울림을 준다. 그건 ‘기다림’을 시작하는 신호이기 때문이다. 농사를 시작하기 전 나는 기다림이란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뭐든 빨리 되기를 바랐고, 결과를 서두르며 살았다. 도시에서의 삶은 늘 ‘속도’가 기준이었고, 사람들은 누가 더 효율적인지, 누가 더 빨리 도달했는지를 중요하게 여겼다. 하지만 이 땅에서 농사를 지은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농업은 결과를 재촉할 수 없는 유일한 삶의 방식이고, 그 중심엔 ‘기다림’이 있다.

푸른-하늘-아래-넓은-농장

 

씨를 뿌리고 나면 할 수 있는 일은 의외로 많지 않다. 물을 주고, 온도를 맞추고, 주변을 정리하고, 해충을 막고, 매일 살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물이 자랄지 말지는 내 손에 달려 있지 않다. 땅의 상태, 날씨의 흐름, 씨앗의 기운, 모두가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움트기 시작한다. 그 시간 동안 나는 오롯이 기다린다. 어떤 잎이 튀어나올지, 어떤 속도로 자랄지, 상처 없이 자라줄지. 수많은 변수 속에서 나는 오직 ‘믿고 기다리는 일’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그 기다림이 나를 가장 사람답게 만들어준다. 조급함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이제는 그 조급함을 어루만지는 법을 배웠다. 농사는 기다림의 연습이고, 그 속에서 인간은 겸손해진다. 기다림은 단지 시간의 흐름을 참는 게 아니다. 그건 아주 능동적인 행위다. 오늘의 기온을 읽고, 내일의 햇빛을 예측하며, 일주일 뒤의 발아를 상상하고 대비하는 일이다. 마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릴 때처럼, 나는 매일 작물의 상태를 살피며 기다린다. 어제보다 진해진 잎의 색, 살짝 올라온 줄기의 각도, 뿌리 근처의 미세한 수분 변화. 그런 사소한 징후들이 쌓여 기다림은 점점 깊어지고, 그 과정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작물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느낀다. 결국 기다림은 나를 땅과 이어주는 실이다. 결과가 보이지 않아도 계속 손을 놓지 않게 만드는 힘. 농사는 그렇게 매일, 작은 신뢰를 쌓아가는 일이다. 가장 오래 기다렸던 건, 바질이었다. 초여름에 심었던 바질이 좀처럼 크지 않았다. 온도도 적절했고, 양액도 균형 있었고, 해도 잘 들었다. 그런데도 바질은 몇 주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 답답했다. 무엇이 문제인지, 내가 뭘 놓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하루는 혼잣말로 이렇게 말했다. “왜 안 자라니, 대체 뭐가 부족한 거야?” 그날 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나 혼자 조바심 내고 있는 건 아닐까? 얘는 지금 자라고 있는 중일 수도 있잖아.’ 그렇게 마음을 바꿨다. 그냥 지켜보기로. 물을 줄 때도, 온도를 조절할 때도, ‘왜 아직도?’가 아니라 ‘괜찮아, 네 속도로 자라’라고 말해보기로 했다. 그리고 정확히 10일 뒤, 바질은 폭발하듯 자라기 시작했다. 그 잎은 이전보다 두꺼웠고, 향은 훨씬 강했다. 기다림이 허무하지 않았다는 걸, 그 바질이 말해주었다.

 

사람들은 기다림을 낭비로 착각하곤 한다. 하지만 농부는 안다. 진짜 기다림은 가장 강력한 성장의 전제라는 걸. 씨앗은 어둠 속에서 먼저 자란다. 땅 아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뿌리를 내리고, 기회를 엿보며, 준비한다. 겉으로는 아무 변화가 없어 보여도, 생명은 그 아래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그걸 믿는 게 농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싹이 터지지 않은 밭 앞에서 조급하지 않다. 어쩌면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기다림은, 그걸 믿는 행위다. 보이지 않아도, 만져지지 않아도, 곧 온다는 걸 믿는 마음.

농사를 통해 나는 내 인생도 다시 보게 됐다. 예전엔 너무 많은 걸 빠르게 가지려 했고, 기다릴 줄 몰랐다. 관계에서도, 꿈에서도, 노력에서도 인내보다 결과에 집착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나라는 사람도, 이 삶도, 모두 자라고 있는 중이라는 걸. 하루하루 밭을 돌며 작물의 느림을 받아들이듯, 나의 느림도 인정하게 됐다. 모든 건 시간 안에 있다. 때가 되면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가 열린다. 그건 누구도 억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초조하지 않다. 내 안에도 기다림의 뿌리가 자랐기 때문이다. 해가 지는 하우스 안, 오늘도 아직 싹이 안 튼 트레이 앞에 잠시 앉아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었고, 공기는 고요했다. 그곳에서 나는 아무 말 없이 앉아, 그냥 기다렸다. 이미 익숙해진 시간이었다. 이젠 안다. 농사는 기다림의 연습이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라는 걸.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농부로 살아간다. 아니, 기다릴 줄 아는 사람으로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