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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장에서 마주한 죽음 - 고사한 작물, 그리고 마음 정리

by 519kiki 2025. 6. 4.

오늘은 밭에서 루꼴라 고랑 하나를 통째로 갈아엎었다. 병해가 너무 심하게 퍼졌다. 며칠 전부터 잎에 이상한 반점이 생기더니, 금세 퍼지기 시작했고 잎끝이 마르며 줄기까지 시들기 시작했다. 처음엔 일부만 손상된 줄 알고 조심스럽게 문제 잎만 골라냈지만, 이미 뿌리까지 병이 퍼진 상태였다. 이대로 두면 옆 고랑까지 전염될 위험이 있었기에, 결국 ‘전면 폐기’라는 결정을 내렸다. 밭을 정리하는 동안 마음이 참 복잡했다. 잘 자라던 아이들이었고, 이번에 품질도 좋아 출하 기대를 많이 했던 작물이었다. 그 기대가 무너진 자리에서, 나는 마치 사람의 장례를 치르듯 조심스럽고 무겁게 작업을 이어갔다. 농사를 시작한 이후, 나는 수많은 생명을 키우면서 동시에 수많은 죽음을 마주했다. 그리고 그 죽음 앞에서 매번 멈추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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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물의 죽음은 소리 없이 온다.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지는 일도 있지만, 대부분은 아주 작은 신호에서 시작된다. 잎의 색이 바뀌거나, 줄기의 강도가 떨어지거나, 뿌리가 흙을 더 이상 붙잡지 못하는 느낌. 나는 그것을 손끝으로, 눈으로, 감각으로 감지하게 되었다. 처음 몇 번은 병을 알아차리지 못해 전면 피해를 입기도 했다. 그때는 자책이 컸다. “내가 뭘 잘못했지?” “물을 너무 줬나, 너무 말렸나?” “흙이 산성화됐나?” 이유를 찾느라 밤잠을 설친 적도 많다. 하지만 어떤 죽음은 이유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아무리 환경을 조절하고 최적의 조건을 맞춰도, 생명은 예측대로 자라지 않는다. 그 불확실함 속에서 나는 매번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버틸 수 없고, 정리하지 않으면 다음 씨앗을 뿌릴 수 없다. 특히 가장 기억에 남는 죽음은 작년 여름, 바질 하우스였다. 한창 수확을 앞두고 있었고, 향도 진하고 품질도 좋아 스스로도 기대가 컸던 시기였다. 그런데 태풍이 지나간 후 환기창 일부가 고장 나 내부 습도가 급격히 올라갔고, 며칠 사이 곰팡이병이 퍼졌다. 일주일도 안 되어 80% 가까운 바질이 고사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작물의 죽음을 앞에 두고 울었다. 그동안 흘렸던 땀이 떠올랐고, 매일같이 손으로 다듬던 잎들의 감촉이 생각났고, 아침마다 문을 열고 “잘 자랐니?” 하고 건넸던 인사들이 무의미해진 것 같았다. 농사는 노력과 결과가 반드시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걸 그때 처음 온몸으로 느꼈다. 그리고 그런 불일치 속에서 농부는 매번 자신을 다잡아야 한다. 죽음을 안고도 다시 심을 수 있어야 한다. 정리하면서도 내면의 균형을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죽은 작물을 치우는 일은 감정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버겁다. 뿌리가 썩은 흙을 뒤엎고, 병든 줄기를 잘라내며 마치 그 아이와 이별을 고하는 느낌이 든다. 한 뿌리, 한 뿌리 손에 쥘 때마다 “미안해. 잘 지켜주지 못해서.”라는 말을 속으로 한다. 누군가는 웃을지도 모르겠다. 식물한테 미안하다고? 하지만 나에게 작물은 그저 상품이 아니라, 함께 하루하루를 살아온 존재였다. 그 존재와의 이별은 단지 손실이 아니라 감정의 단절이기도 하다. 죽음을 정리한다는 건, 그런 감정을 하나하나 마음속에 묻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묻음 위에 새로운 시작이 자란다. 땅을 다시 고르고, 퇴비를 뿌리고, 물을 적셔 흙을 살리는 일. 그렇게 나는 다시 생명을 준비한다. 죽음을 정리하지 않으면 새로운 씨앗은 뿌리내릴 수 없다. 오늘 밭을 다 정리한 뒤, 비어 있는 고랑을 멍하니 바라봤다. 흙은 아직 젖어 있었고, 잎이 썩은 냄새가 살짝 코끝을 스쳤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가 고맙기도 했다. 내 손으로 살리지 못한 생명이었지만, 나에게 많은 걸 남겨주었다. 관리의 중요성, 기후 대응의 민감성, 무엇보다 생명의 무상함. 그리고 동시에 ‘이래서 농사를 그만둘 수 없구나’라는 묘한 끌림까지. 생명을 키우는 일이란, 결국 죽음과 맞닿아 있는 일이기도 하다. 죽음을 마주할 수 있어야 진짜 생명을 소중히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농부는 매일 생사 앞에 선 사람이다. 씨를 뿌릴 때는 기도를 하고, 고사를 정리할 때는 묵념을 한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고 다음을 준비한다. 해질 무렵, 빈 고랑 옆에 바질 모종을 몇 개 옮겨심었다. 아직 온전한 회복은 아니지만, 그렇게 시작해보려 한다. 이번엔 더 천천히, 더 조심스럽게, 더 많이 말을 걸면서 키워볼 생각이다. 농장에서의 죽음은 끝이 아니라, 흐름의 한 부분이다. 정리하고, 돌아보고, 다시 채우는 일. 그 과정이 반복되며 나도 점점 농부가 되어간다. 그리고 그렇게 또 한 계절이, 조용히 지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