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오랜만에 도시에서 반려견 ‘보리’가 농장에 왔다. 예전 직장생활을 할 때부터 함께 지냈던 아이인데, 내가 귀농을 하면서 가족과 떨어져 지내게 되었다. 도시에선 가족과 함께 지내고 있었고, 나도 가끔 주말에만 얼굴을 보곤 했는데, 오늘은 가족이 모두 함께 농장에 와서 보리도 데려온 것이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흙 냄새를 맡고 달려 나가는 보리를 보며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평소에 콘크리트 위만 걷던 아이가, 갑자기 흙 위를 신나게 달리는 모습은 낯설기도 하고 애틋하기도 했다. 도시에선 리드줄에 묶여 아파트 주변만 맴돌던 보리가, 지금은 온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바람을 맞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나 자신을 보는 듯했다. 도시에서 얽매인 삶을 살다 땅을 밟고 나와 숨 쉬기 시작한 나의 모습과 겹쳐졌다.
처음에는 걱정도 됐다. 이 넓은 밭에서 길이라도 잃을까, 갑자기 다른 짐승을 만나 놀라지는 않을까. 하지만 보리는 놀랄 만큼 침착하고, 동시에 들뜬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상추 고랑 사이를 뛰어다니며 잎사귀를 냄새 맡고, 퇴비장 근처에서 흙을 파헤치고, 때론 이름 모를 곤충을 쫓으며 왔다 갔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따라가며 마치 농장을 처음 방문한 손님처럼 이곳을 다시 보게 됐다. 나는 늘 이 밭을 관리하고, 효율적으로 작업하는 공간으로만 생각했지만, 보리에겐 이 모든 곳이 하나의 ‘세상’이었다. 한 잎, 한 냄새, 한 바람까지도 새로운 경험이자 놀이였다. 그걸 보고 있으니 내가 그동안 얼마나 바쁘게만, 기능적으로만 농장을 바라봤는지를 반성하게 됐다. 자연은 느끼는 대상이지, 계산하는 대상이 아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보리가 상추밭 옆에서 조용히 엎드려 하늘을 바라보던 모습이다. 잠시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바라보는 그 눈빛에서 나는 인간보다 더 깊은 평화를 느꼈다. 말이 없다는 이유로 동물의 감정은 단순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건 큰 오산이었다. 보리는 분명 이 공간의 공기를 읽고 있었고, 그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고 있었다. 나도 그 옆에 앉아 아무 말 없이 하늘을 보았다. 그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더 깊은 교감이었다. 말이 없어도, 서로를 바라보는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연결되어 있었다. 농장에서 함께 숨을 쉬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땅 냄새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점심시간, 그늘 아래서 도시락을 먹었다. 보리는 내 옆에 바짝 붙어 앉아 있었고, 내가 나눠준 상추 한 장을 천천히 씹어먹었다. 도시에선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그 아이가 이렇게 신선한 채소를 씹으며 고요히 쉬는 모습은 내게도 안정을 주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늘 보리에게 맛있는 간식이나 사료만을 챙겨주며 만족해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은 느꼈다. 그 아이에게 진짜 필요한 건 ‘공간’과 ‘시간’이라는 것을. 한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넉넉한 공간, 그리고 강요받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농장은 그 두 가지가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같은 의미였다. 그동안 이곳이 나만의 쉼터라고 생각했지만, 보리에게도 이곳은 분명 새로운 세계였고, 아마 잊지 못할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오후에는 하우스 안으로 함께 들어갔다. 평소 외부인이나 동물을 들이지 않는 구역이지만, 오늘만큼은 조심스럽게 보리와 함께 둘러봤다. 보리는 하우스 특유의 습도와 냄새에 놀란 듯했지만, 곧 익숙해지더니 조심스레 잎을 스치며 천천히 걸었다. 작물들도 신기한 듯 보리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움직임이 작고 조용한 아이 덕분에 작물들이 놀라지도 않았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보리야, 네가 농장에 처음 온 손님이네. 나보다도 더 부드럽게 이곳에 스며들었구나.” 그 말에 보리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내 눈을 바라봤다. 대답은 없었지만, 그 눈빛이 모든 걸 말해줬다. 감사함, 평화, 그리고 소속감.
해 질 무렵, 우리는 함께 밭둑을 걸었다. 햇빛은 노랗게 물들었고, 바람은 서늘해졌으며, 보리의 걸음도 한결 느려졌다. 아마도 하루 종일 뛰놀고, 온갖 냄새를 맡으며 지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표정은 지친 게 아니라 만족스러웠다. 나도 그랬다. 오늘 하루는 유난히 마음이 가벼웠다. 작물 수확도 없었고, 특별히 큰 작업도 없었지만, 마음이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생명과 생명이 같은 공간에서 호흡하고, 서로를 바라보며 하루를 보냈다는 사실이 내게 큰 울림을 주었다. 우리는 종종 ‘사람끼리의 관계’만을 중요하게 여기지만, 오늘 하루 나는 반려견과 함께하면서 관계의 본질은 서로가 서로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것임을 느꼈다. 말도, 계획도, 목적도 없이 그냥 함께 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교감이었다.보리는 이제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차가 농장을 벗어날 때까지 나는 가만히 서 있었다. 그리고 돌아서서 밭 한가운데에 앉았다. 보리가 뛰어놀던 그 자리엔 아직도 발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그 흔적을 바라보며 나는 조용히 속삭였다. “다음에 또 오자. 이곳은 너를 기다리고 있을게.” 농사는 사람만의 일이 아니다. 땅도, 작물도, 동물도, 함께 살아가는 모든 존재가 이곳의 주인이다. 오늘 하루, 나는 그 사실을 다시 마음에 새겼다. 보리와 함께한 농장의 하루는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생명과 생명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