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농장에 아이들이 왔다. 근처 초등학교에서 체험학습을 신청했고, 교장 선생님이 직접 전화를 걸어 아이들에게 “진짜 농부의 하루”를 보여주고 싶다고 하셨다. 사실 처음엔 망설였다. 작물 관리로 한창 바쁠 시기이고, 안전 문제나 준비물, 동선 같은 것도 걱정됐다. 하지만 교장 선생님의 진심 어린 말 한마디에 마음이 움직였다. “아이들이 흙을 밟아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난답니다.” 그 말을 듣고 나니 내가 느끼는 하루의 당연함이 누군가에겐 아주 낯설고도 귀한 경험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지금 이 일을 왜 하고 있는지를 아이들 눈높이에서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오늘을 준비했다. 복잡한 설명 대신, 아이들과 눈을 맞추고 흙을 만지며 느끼는 하루를.
아침부터 농장은 분주했다. 하우스 바닥에 미끄러지지 않게 매트를 깔고, 수확 체험 구역을 따로 나눴다. 바질, 상추, 루꼴라, 청경채. 손으로 만져도 덜 상하는 아이들 위주로 안내하기로 했다. 오전 10시, 버스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내리기 시작했다. 2학년부터 4학년까지, 20여 명쯤 되었는데, 처음 보는 하우스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여기가 진짜 농장인가요?” “여기서 상추가 나와요?” 첫 반응부터 순수함이 넘쳤다. 나는 장화를 신고 나와 인사를 했다. “안녕, 나는 이 농장에서 작물을 기르고 있는 사람, 농부야. 오늘은 너희가 직접 작물을 보고, 만지고, 따보고, 맛도 보는 날이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치 탐험대가 된 듯 신이 나 있었다. 하우스 안에 들어서는 순간, 아이들 반응은 더 뜨거워졌다. “우와, 이거 뭐예요?” “잎에서 꿀 냄새나요!” “이 풀 냄새 진짜 이상해요, 근데 좋다!” 나는 하나하나 대답해주면서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명했다. “이건 루꼴라야. 살짝 매운 풀인데, 샐러드에 넣으면 향이 진해져.” “이건 바질인데, 피자나 파스타 위에 올라가는 향기 나는 채소야.” 아이들은 신기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일부 아이들은 잎을 손으로 부비고는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진지하고도 귀엽던지, 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 순간, 나는 느꼈다. 농사를 모르는 아이들이지만, 그들은 본능적으로 ‘자연’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단 한 번의 설명만으로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고 반응한다는 걸. 수확 체험 시간에는 상추와 바질을 따보게 했다. “하나씩, 조심히, 줄기 밑을 잡고 살짝 당겨보자.” 아이들은 조심조심 손을 내밀었다. 어떤 아이는 너무 조심해서 상추 잎 하나 떼는 데 30초가 걸렸다. 하지만 그 손끝엔 분명 책임감이 있었다. “이게 살아 있는 거니까, 다치게 하면 안 돼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순간 멈췄다. 맞다. 작물은 살아 있는 존재다. 내가 매일같이 만지고 관리하는 존재들이지만, 이렇게 똑바로 그 생명감을 바라보는 건 어쩌면 아이들이 더 잘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나는 늘 생산성과 품질, 시장 가격을 먼저 생각했지만, 이 아이들은 단 한 줄기 상추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수확을 마친 뒤, 모두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먹었다. 내가 준비한 건 농장에서 막 수확한 상추, 청경채, 루꼴라를 넣은 샐러드와 바질 페스토 샌드위치. 간식처럼 나눠준 그 음식 앞에서 아이들은 처음엔 조금 망설였지만, 한 입 먹고는 눈을 반짝였다. “이거 내가 딴 상추예요?” “이 풀 진짜 맛있어요!” “마트 거랑 냄새가 달라요.” 이 짧은 반응들이 내게는 깊은 울림이었다. 하루 종일 땀 흘려 일한 농부의 손끝에서 나온 음식이, 누군가의 입속으로 들어가고, 그 순간 기쁨이 된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농사의 가장 근본적인 가치가 아닐까. 수확, 생산, 판매, 유통 이전에, ‘누군가를 기쁘게 하는 일.’ 그것이 농사다. 체험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 한 아이가 내 옆으로 와서 이렇게 말했다. “농부 아저씨, 나도 나중에 커서 이런 데서 살면 좋겠어요.” 나는 한참을 말없이 그 아이를 바라보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여기서 살면 자연이랑 친구가 될 수 있어. 그리고 그건 정말 멋진 일이야.” 그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버스에 올라탔다. 문이 닫히고, 버스가 천천히 떠나갈 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울컥했다. 누군가는 농업을 낡은 산업이라 말하지만, 오늘 나는 한 아이의 꿈이 농장 한가운데서 싹트는 모습을 봤다. 그리고 그 씨앗은 내가 뿌린 것이 아니라, 땅이, 작물이, 흙이 자연스럽게 아이의 마음에 옮긴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 나는 다시 확인했다. 농사는 단순히 땅에서 먹거리를 키우는 일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까지 키우는 일’이라는 걸. 특히 아이들과 같은 순수한 존재 앞에서는, 농부라는 직업이 얼마나 깊고 소중한 역할을 하는지를 절실히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흙을 밟고, 작물과 눈을 맞추며 웃음을 터뜨릴 때, 나는 내 일의 의미를 되묻게 된다. 오늘 하루는 작물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그 아이들에게도 아주 특별한 기록으로 남았을 것이다. 언젠가 그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흙을 만지고 싶어질 때, 오늘의 이 장면이 다시 떠오르길 바라며, 나는 조용히 하우스 문을 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