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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촌에서 보내는 명절(도시 가족과의 문화 차이)

by 519kiki 2025. 5. 20.

오늘은 추석 연휴 셋째 날. 명절이면 늘 그랬듯 도시에서 가족들이 내려오는 날이다. 아침부터 마당을 쓸고, 텃밭 옆 그늘막 정리하고, 간단하게 먹을 채소 몇 가지를 수확했다. 평소엔 혼자 조용한 농장에 북적한 목소리가 들리는 날이다. 가족들이 도착하자 아이들의 목소리부터 공기를 바꿨다. “와, 여기가 진짜 아빠 농장이에요?”, “어우, 시골 냄새!” 웃음과 함께 조금은 낯선 표정들. 나는 그 모습이 익숙하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내 아이들과 친척들에겐 이곳의 모든 것이 낯설고 때론 불편하다. 냄새, 벌레, 먼지, 바닥의 촉감까지. 하지만 나는 그 낯섦을 탓하지 않는다. 도시에서의 삶도 충분히 이해하고, 그 안에서 익숙해진 감각도 알고 있다. 오히려 그 낯선 공간에서 잠시나마 ‘같은 공기’를 마시며 시간을 나눌 수 있다는 게 내겐 감사한 일이다. 명절이 되면 도시는 멈추지만, 농장은 멈추지 않는다. 특히 작물 수확기가 겹치면 오히려 더 바빠진다. 하우스 온습도 조절, 급수 체크, 명절 연휴 직후의 택배 예약까지. 가족들이 와서 시끌벅적한 와중에도 나는 새벽과 저녁 시간대엔 조용히 밭으로 나가게 된다. 그럴 때마다 “명절인데도 일하세요?”라는 말을 듣곤 한다. 도시에서는 명절은 ‘쉼’의 상징이지만, 농촌에서는 ‘쉴 수 없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물론 나도 명절 음식을 먹고, 가족과 웃고 떠들며 시간을 보내지만, 완전히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작물은 달력을 보지 않고, 연휴를 고려하지 않는다. 그 현실을 설명하면 누군가는 안쓰럽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안 믿기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겐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녹색-밀-사진

 

가족들과 농장에서 명절을 보내다 보면 크고 작은 문화 차이를 종종 느낀다. 예를 들면 도시 가족들은 아침에 일어나 늦게까지 커피를 마시며 여유를 즐기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새벽에 일어난다. 이미 닭이 울고, 이슬을 맞은 작물이 깨어나는 시간에 나는 바깥을 돈다. 그 사이 도시 가족들은 아직 이불 속이다. 아침 7시에 내가 밭에서 땀을 흘리고 돌아올 때, 식탁에선 커피 냄새가 퍼진다. 그때 나는 조금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시간대에 사는 듯한 기분. 한편으론 그 모습이 부럽기도 하다. 나도 언젠가 그런 아침을 보내본 적이 있었던가. 아니,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농사를 짓는 순간부터 내 시간은 작물과 함께 흘러가기 시작했고, 그 흐름은 내가 멈추고 싶다고 멈춰지지 않았다. 또 하나 크게 느껴지는 차이는 ‘일에 대한 거리감’이다. 도시 가족들에게는 농사일이 마치 특별한 체험처럼 보인다. “한번 도와줄까?” 하고 장갑을 끼고 밭에 따라나서지만, 불과 30분 만에 “이거 생각보다 힘들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당연하다. 이 일은 체험으로 겪기엔 너무 깊고, 너무 꾸준해야 의미가 생긴다. 그렇다고 억지로 시키지도 않는다. 농사의 고됨은 말로 설명할 수 없고,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내가 이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자부심을 갖고 있는지만 느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때때로 아이들이 “이런 데서 사는 건 심심하지 않아?”라고 묻는다. 그럴 땐 잠시 생각에 잠긴다. 심심하단 말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도시의 자극적인 삶에 비하면 심심할 수 있다. 하지만 매일같이 변하는 날씨, 싹이 트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작은 일들이 가득한 이곳에선, 나는 단 한 번도 지루하다고 느낀 적이 없다.

명절의 저녁은 언제나 따뜻하다. 고기 굽는 냄새, 웃음소리, 서로의 삶을 묻는 이야기들.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지는 짧은 교차점. 나는 그 사이에 서 있다. 한쪽으로는 여전히 도시의 시간감각을 가진 채 살아가는 내 가족, 또 다른 한쪽으로는 매일 농장과 함께 살아가는 지금의 나. 그 둘을 모두 이해하면서도 가끔은 외롭기도 하다. ‘나는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라는 질문 앞에선 선뜻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곳의 삶은 누군가에게 낯설고 불편하겠지만, 내겐 너무도 분명하고 단단하다는 것이다. 도시 가족들이 며칠을 보내고 돌아갈 때면, 차창 밖으로 손을 흔들며 웃는다. 그리고 나는 다시 혼자 남아 텅 빈 마당을 바라본다. 그때의 고요함은 외로움이기도 하고, 다시 내 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이기도 하다. 오늘 밤, 밭을 한 바퀴 더 돌았다. 낮 동안 손님이 많아 미처 못 살핀 작물들을 하나씩 살폈다. 상추는 여전히 싱싱했고, 바질은 비에 젖어 향이 더 짙었다. 나는 줄기 하나를 꺾어 향을 맡으며 속으로 말했다. “이곳은 내 삶이고, 이 시간이 나의 명절이다.” 도시의 명절은 쉼과 풍요, 재회라면, 농촌의 명절은 여전한 노동 속의 잠깐의 나눔,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삶의 루틴이다. 나는 둘 다 좋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분명 이 땅의 시간 위에 서 있다.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명절을 맞는다는 것이, 이제는 아주 익숙하고 편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