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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친구가 처음 밭에 왔을 때 느낀 거리감과 화해

by 519kiki 2025. 6. 3.

오늘은 오랜 친구 ‘지훈’이가 농장에 왔다. 대학 시절부터 10년 넘게 알고 지낸 친구인데, 내가 귀농한 후로는 연락만 몇 번 주고받았을 뿐 실제로 얼굴을 본 건 거의 3년 만이다. “한번 가볼게”라는 말은 여러 번 들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계속 미뤄지던 만남이었다. 이번엔 아예 하루 시간을 내어 직접 차를 몰고 내려왔다. 오전 11시쯤 농장 입구에 도착한 그를 보며 나는 반가움보다는 약간의 어색함을 먼저 느꼈다. 반바지에 운동화, 선글라스까지 낀 친구는 이곳 풍경과 묘하게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나는 흙 묻은 고무장화를 신고 있었고, 땀에 젖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지만, 순간 ‘우린 지금 너무 다른 세계를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네가 말하던 농장이구나.” 친구는 그렇게 말하며 하우스를 천천히 둘러봤다. 나는 최대한 설명을 덜 하려고 했다. 굳이 길게 말하지 않아도, 이곳의 공기와 냄새와 온도가 스스로 전달해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친구는 연신 “우와”를 연발하면서도 동시에 당황한 눈치를 감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덥다”, “벌레가 너무 많아”, “냄새가 좀…”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켠이 묘하게 쓰렸다. 그 모든 것이 내겐 일상이자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들이었기에, 친구의 반응이 마치 내가 살아온 시간 자체를 낯설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건 원망이 아니라, 서로 너무 달라진 삶을 인식하는 순간의 씁쓸함이었다. 

낮-흰-구름-아래-산-앞에-녹색-밭

 

밭을 같이 한 바퀴 도는 동안, 친구는 내가 물을 주는 모습, 흙을 다지는 모습, 잎을 살피는 손길을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일… 진짜 할 만해? 힘들진 않아?” 나는 그 질문에 잠시 말을 고르다 이렇게 답했다. “힘들지. 근데 그 힘듦이 나한텐 나쁘지 않아.” 그 말에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다. “넌 진짜… 다른 길을 갔구나.” 그 말은 칭찬도, 부러움도 아닌 일종의 확인처럼 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이렇게 오랜 친구지만, 지금은 서로 다른 삶을 살고 있고, 서로의 선택을 쉽게 이해하긴 어렵다는 걸. 하지만 그 다름이 틀림은 아니라는 것도. 점심은 내가 직접 키운 채소로 만든 비빔밥을 대접했다. 바질을 곁들인 된장국도 함께 냈다. 친구는 처음엔 어색해했지만, 한 입 두 입 먹으며 “맛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나는 속으로 안도했다. 도시의 입맛에 맞을지 걱정했지만, 다행히 자연 그대로의 맛이 친구에게도 닿은 것 같았다. 식사를 마친 뒤, 우리는 그늘 아래 앉아 한참을 얘기했다. 회사 얘기, 사람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 친구는 요즘 일에 많이 지쳐 있었다. 밤늦게까지 회의하고, 사람들 눈치 보고, 승진 때문에 신경 곤두세우는 삶. 그런 삶이 견디기 힘들다고 말했다. 나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그 말 끝에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부러울 때도 많아. 이렇게 살 수 있다는 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속에 있던 거리감이 조금씩 녹았다. 나도 도시를 살아봤기에, 그의 고단함을 이해했고, 그는 이 땅의 고요함 속에 잠시나마 쉼을 느낀 듯했다.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다시 가까워졌다. 삶의 방식은 달랐지만, 삶의 본질적인 고민은 결국 비슷했다. 어떻게 잘 살 것인가, 어떻게 덜 지치며 버틸 것인가. 그 질문 앞에서는 도시도, 농촌도, 고층 빌딩도, 비닐하우스도 다르지 않았다. 친구는 오후 내내 이곳을 돌아다니며 잎사귀에 손을 얹어보고, 작물 냄새를 맡고, 퇴비 더미 위에 앉아 사진도 찍었다. 그 모습이 처음보다 훨씬 자연스러워 보였다.해질 무렵, 친구는 돌아가야 했다. 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밭을 한 번 더 바라보던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왜 이걸 계속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아.” 그 말은 긴 설명보다 더 깊었다. 나는 웃으며 “다음엔 봄에 와. 꽃 피면 진짜 예뻐”라고 말했다. 친구는 고개를 끄덕이며 창문을 내리고 손을 흔들었다. 차가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서자,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먼지가 가라앉고, 고요함이 다시 돌아왔지만 마음은 묘하게 따뜻했다. 오늘 하루는 농사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거리를 줄여가는 하루였다. 그리고 그게 참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