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마을 어르신께 배운 ‘진짜 농사’의 의미

by 519kiki 2025. 5. 8.

오늘은 아침부터 농장 일을 미루고 마을회관으로 향했다. 마을 어르신들이 모이는 날이다. 사실 처음 귀농했을 때 나는 이 자리에 가는 걸 꺼렸다. 젊은 사람이 뭘 하겠냐는 시선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농사에 대해 조금 배웠다는 자만심도 있었다. 나는 농업대학에서 박사까지 마쳤고, 스마트팜 시스템도 잘 다루고 있었다. 기술만 있으면, 데이터만 있으면 다 된다고 믿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몇 년을 흘려보내면서 점점 알게 됐다. 땅은 책으로 배운 대로 움직이지 않고, 자연은 수치로만 읽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그래서 요즘은 틈만 나면 어르신들 곁에 앉아 귀를 기울인다. 회관에 도착하니 벌써 몇몇 어르신들이 모여 계셨다. 손에는 농기구가 들려 있고, 얼굴에는 깊게 패인 주름과 햇살에 그을린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누군가가 가져온 삶은 고구마를 나눠먹으며, 오늘은 주로 농사 이야기를 했다.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다 한 어르신께서 내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요즘 채소 잘 되나?"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아직 멀었습니다. 기술은 많이 배웠지만, 현장은 다르네요." 그러자 어르신은 빙긋이 웃으셨다. "농사는 기술로 되는 게 아니야. 땅하고 말을 해야 돼." 짧은 한마디였지만, 마음에 깊이 꽂혔다.

옥수수밭-사진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어르신은 손짓 발짓을 섞어가며 말씀하셨다. 땅을 어떻게 만져야 하는지, 비가 오기 전엔 어떤 냄새가 나는지, 씨앗을 뿌릴 때는 손끝으로 그날의 흙 온도를 느껴야 한다는 것. 매뉴얼에도, 데이터에도 없는 이야기였다. 나는 메모도 하지 않고 그저 들었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에 새기듯이. 어르신은 이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농사는 결국 기다리는 일이야. 흙이 때를 알려줄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사람이 서두르면 땅이 삐딱해져." 나는 순간 뜨끔했다. 스마트팜 시스템을 통해 온습도, 토양 상태를 실시간으로 체크하면서도 늘 조급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빨리 키우고, 빨리 수확하고, 빨리 판매하려고만 했던 내 조급함이.

점심때가 되어 회관을 나서면서, 어르신은 내게 밭 한 구석을 보여주셨다. 특별할 것 없는 작은 텃밭. 상추 몇 포기, 고추 몇 줄기, 가지와 오이, 그리고 이름 모를 들풀들까지 섞여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렇게 무질서하게 키워도 되나?' 그런데 어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이게 진짜 농사야. 이 풀도 다 의미가 있다. 이게 흙을 살리고, 벌레를 부르고, 땅을 숨 쉬게 하는 거야." 순간, 눈이 열리는 것 같았다. 깔끔하게 정리된 스마트팜만이 정답이 아니었다. 땅은 더디게 움직이고, 복잡하게 숨 쉬고, 서로 얽혀 살아가는 존재였다. 그걸 억지로 통제하려고만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돌아오는 길, 괜히 마음이 먹먹했다.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땅과 대화를 나누기보다, 땅을 명령하고 조정하려 했던 것 같다. 작물도, 흙도, 자연도 살아 있는 존재인데, 나는 그걸 잊고 있었다. 어르신은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흙을 만질 때는 경건해야 한다는 것을. 씨를 뿌릴 때는 내 욕심이 아니라 자연의 호흡에 맞춰야 한다는 것을. 가을 햇살에 반짝이는 논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는 아직 농부가 아니었구나.' 그날 저녁, 농장에 돌아와 상추밭을 다시 살펴봤다. 고르게 심은 줄 사이로 바람이 스쳤다. 한 번도 그렇게 깊게 들여다본 적 없는 땅의 결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흙은 따뜻했다. 겨울을 준비하면서도 아직 온기를 품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작물 하나하나에 말을 걸었다. '오늘은 어땠니? 춥진 않았니? 물이 부족하진 않았니?' 작물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잎의 탄력, 뿌리의 단단함, 그리고 흙의 촉감이 말해주었다. 농사를 짓는다는 건, 이렇게 하루하루 자연과 눈을 맞추고 마음을 나누는 일이라는 것을. 며칠 뒤, 나는 어르신을 다시 찾아갔다. 작은 고구마 한 박스를 들고.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물었다. "어르신, 저는 아직도 땅하고 말하는 게 어렵습니다." 그러자 어르신은 껄껄 웃으시며 말했다. "괜찮아. 그 마음이면 벌써 반은 온 거야." 농사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 땅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땅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진짜 농사'라는 것을, 나는 오늘 또 한 번 배웠다. 아마 앞으로도 이 배움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땅이 숨 쉬는 법을 배우고, 작물이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비바람 속에서도 기다릴 줄 아는 인내를 키워가는 것. 그것이 농부가 되어가는 길이다. 오늘, 나는 그 길 위에 한 발짝 더 다가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