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처음엔 창밖에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빗방울이 굵어졌다. 농사를 짓기 시작한 이후, 비 오는 날은 마냥 낭만적인 배경이 아니다. 비는 땅을 적시고 작물을 키우기도 하지만, 때로는 하우스를 무너뜨리고 밭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한다.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장화를 신고 농장으로 향했다. 아직 동이 트기 전이라 주위는 어둑어둑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느껴지는 빗물의 무게. 평소와는 다르게 공기까지 눅눅하고 무거웠다. 하우스 문을 열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도했다. 제발, 별 탈 없이 넘어가기를.
하우스 안은 다행히 무너지지 않았다. 빗물도 아직은 잘 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장대비가 계속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빠르게 배수로를 점검했다. 고여 있는 물을 삽으로 퍼내고, 막힌 곳을 뚫었다. 장갑은 금세 물에 젖어버렸고, 이마로 빗방울이 흘러내렸다. 몸은 추웠지만 정신은 맑았다. 농사를 지으면서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위기 상황일수록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걱정하기 전에 손이 먼저 움직인다. 오늘도 그랬다. 온몸이 하우스 구석구석을 돌면서 체크리스트를 확인하는 것처럼 움직였다. 한 시간쯤 지나자 비가 더 거세졌다. 비닐하우스 천장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두 배는 커진 듯했다. 소리가 클수록, 물의 무게도 더해진다. 하우스는 예상보다 약하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물이 고이면 천장이 휘고, 압력이 쌓이면 한순간에 주저앉는다. 내 손으로 직접 설치한 하우스라서 그 구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계속 빗물을 빼내고, 지지대를 점검하고, 천장을 쳐다봤다. 눈은 아프고 목은 뻣뻣했지만, 중간에 멈출 수는 없었다. 작물들도 걱정이었다. 상추와 루꼴라는 비를 직접 맞지는 않지만, 습기가 과하면 쉽게 곰팡이가 생긴다. 그래서 하우스 안 공기를 돌리기 위해 송풍기를 돌리고, 환기창을 조금 열었다. 물론 빗물이 들이치지 않게 각도를 조심히 조정해야 했다. 자연과 싸운다는 느낌보다는, 그저 버텨내야 한다는 절박함이었다. 작물들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만 잘 버티면, 다시 맑은 햇살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중간중간 트럭 안으로 몸을 피했다. 젖은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나왔다. 트럭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 소리를 들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 살 때는 이런 날 그냥 창밖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셨다. 비 오는 날이 싫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비가 너무 오래 머물까 봐 두렵고, 강풍이 동반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자연은 언제나 아름답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는 걸 몸으로 배웠다. 오후가 되자, 비는 조금씩 잦아들었다. 하지만 하우스 안 공기는 무거웠고, 작물들은 축 처진 잎을 달고 있었다. 특히 청경채 몇 줄기는 습기로 잎이 무른 기운이 보였다. 빠르게 통풍을 더 세게 하고, 환기창을 넓혔다. 물론 이 작은 조치들이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농사는 늘 그렇다. 오늘 잘한다고 내일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오늘의 관리가 일주일, 한 달 뒤에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매 순간이 무겁고, 그래서 매 순간을 포기할 수 없다.
저녁이 가까워지자 빗방울이 끊겼다. 하우스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내리기 직전의 짙은 회색빛 하늘이 펼쳐졌다. 땅은 진흙탕이 되었고, 장화는 걷는 족족 쩍쩍 소리를 냈다. 그래도 다행이었다. 하우스는 무너지지 않았고, 작물들도 대부분 제자리를 지켰다. 하루 종일 젖은 몸을 이끌고 버텼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성취감이 있었다. 오늘 하루, 나는 내 작물들을 지켜냈다. 완벽하진 않지만, 최선을 다해 지켜냈다. 농사를 지으며 이런 날들을 수없이 맞이했다. 장마철의 폭우, 태풍의 강풍, 예상치 못한 냉해. 그때마다 몸은 고되고 마음은 조마조마했지만, 끝까지 버티고 나면 늘 작은 보상이 따라왔다. 잎사귀 하나, 뿌리 하나, 온몸으로 살아남은 증거를 품은 작물들. 그 아이들을 보면, 비 온 날의 고생쯤은 잊게 된다. 오늘도 그렇게 또 하나의 고비를 넘었다. 흙 묻은 손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이제 곧 별이 보일까. 맑은 하늘 아래서 다시 자라날 작물들을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농장을 한 바퀴 돌았다. 빗물에 젖은 흙냄새가 진하게 퍼졌다. 비 온 뒤 땅은 조금 더 단단해지고, 작물은 조금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조금 더 단단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