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새벽 5시에 농장에 도착했다.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각이었다. 새벽은 언제나 나를 경건하게 만든다. 세상이 아직 깨어나지 않았고, 오직 나와 작물들만 존재하는 고요한 공간 속에 서 있을 때, 마치 자연과 단둘이 만나는 기분이 든다. 트럭에서 내리자, 발밑에서부터 서서히 피어오르는 안개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물안개였다. 지열과 차가운 공기가 맞부딪히며 만들어낸 이른 아침의 선물 같은 풍경.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농사꾼으로 산 지 꽤 되었지만,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마다 여전히 말문이 막힌다.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그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싶어진다. 이건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내가 짓는 농사의 또 다른 얼굴이다.
하우스로 향하는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일부러 그랬다. 오늘은 이 물안개를 조금 더 오래 보고 싶었다. 고요히 흐르는 안개는 바람 한 점 없는 새벽 공기를 타고, 땅 위를 유유히 스며들었다. 대지를 덮은 이 얇은 이불 아래에서 작물들이 잠들어 있는 듯했다. 어쩌면 깨어나기 직전일지도 모르겠다. 손등을 스치는 공기가 차가웠지만, 마음은 따뜻해졌다. 이런 풍경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축복받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농사라는 일은 분명 고되고 반복되는 일이지만, 자연이 가끔 이런 보상을 준다. 그리고 그 순간만큼은 모든 힘겨움이 잊혀진다. 하우스 문을 열었다. 안은 아직 어둑했고, 조명도 켜지기 전이었다. 물안개가 살짝 안으로 스며든 탓에 하우스 안도 마치 영화 속 장면처럼 뿌옇게 변해 있었다. 이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나는 작물 하나하나를 조용히 둘러보았다. 상추 잎 위에는 밤새 맺힌 이슬이 반짝이고 있었고, 바질 잎은 안개를 맞으며 더 진한 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작물들도, 하우스도, 바람조차 숨을 죽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손바닥으로 살짝 잎을 만졌다. 차가운 수분이 손끝을 적셨다. 이토록 조용한 순간에, 작물도 나도 서로에게 말을 건넬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잠시 무릎을 꿇고 땅을 만졌다. 물기가 살짝 올라온 흙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했다. 이 흙 속에서 오늘도 수천 개의 뿌리가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놀랍게 느껴졌다. 우리가 흔히 지나치는 ‘흙’이라는 존재가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하며, 살아있는 생명의 기반이라는 걸 농사를 지으며 비로소 알게 됐다. 그리고 새벽은 그 흙의 가장 진실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낮의 햇살이 모두 날려버릴지도 모를 그 섬세한 감촉이, 이 새벽의 물안개 속에서는 오롯이 살아 숨 쉰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에 농장에 있는 것을 좋아한다. 하루의 가장 맑고, 가장 솔직한 풍경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른 새벽, 농장 주변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말소리, 차량의 소음, 휴대폰 진동마저 사라진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내가 진짜 농부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스마트팜 시스템이 아무리 정교해도, 데이터가 아무리 잘 정리돼 있어도, 이 새벽을 함께 보내지 않고서는 작물과 진짜 교감을 나눌 수 없다. 새벽의 물안개는 단순히 풍경이 아니라, 농사의 본질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상징 같은 존재다. 느림, 기다림, 침묵, 그리고 아주 작고 섬세한 변화. 그것들이 쌓여 작물 하나가 자란다. 그리고 그것들이 나를 지금 이 자리에 있게 만든다. 안개가 점점 걷히기 시작했다. 먼 동쪽 하늘이 희미하게 붉어졌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이 안개도 곧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남은 이 짧은 시간에 좀 더 눈을 크게 떴다. 조금이라도 더 이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매일 아침 오는 새벽이지만, 똑같은 하늘과 땅은 없다. 어제의 안개와 오늘의 안개는 다르고, 오늘의 감정은 내일의 감정과 또 다르다. 농사는 그래서 지루할 틈이 없다. 날마다 변하고, 날마다 새롭다. 그 모든 변화를 매일 맞이하며 나는 또 하루를 살아간다. 해가 완전히 떠오르기 전, 나는 하우스 문을 다시 닫고 밖으로 나왔다. 안개는 이미 많이 걷혀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는 긴 하루를 견딜 힘이 되는 순간이었다. 물안개 속을 걸었던 그 몇 분이, 내게는 휴식이었고, 위로였고, 농부로서의 나를 다시 다잡는 묵상의 시간이었다. 누군가는 이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마음으로 기록해 두었다. 오늘 새벽 5시, 물안개가 피어난 내 농장의 모습.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시작할 힘을 얻었다. 그리고 내일도 같은 시각, 또 이 자리에서 이 안개를 기다릴 것이다. 그건 나에게 가장 아름다운 ‘출근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