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우스 안을 돌며, 지금 자라고 있는 작물 하나하나를 찬찬히 바라봤다. 상추, 루꼴라, 바질, 청경채, 어린잎채소까지. 각각의 작물이 자라는 모양과 속도를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들은 정말 정직하구나.’ 물을 얼마나 주었는지, 햇빛을 얼마나 받았는지, 내가 얼마나 관심을 기울였는지, 작물은 거짓 없이 그대로 반응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숨길 수도, 가릴 수도 없다. 내가 게으르면 그만큼 작물도 아프고, 내가 정성을 다하면 그만큼 더 단단하게 자란다. 그 진실함 앞에서, 나는 오늘도 고개를 숙였다. 농사는 절대 요령이 통하지 않는 일이라는 걸, 이 작물들이 매일같이 내게 말해주고 있다.
이번 달 들어 날씨가 참 들쑥날쑥했다. 갑작스레 쏟아지는 비, 생각보다 더 뜨거운 햇살, 그리고 밤낮의 큰 일교차까지. 스마트팜 시스템이 도움을 주긴 하지만, 그 모든 것을 감당하려면 결국 ‘농부의 감’이 필요하다. 아침마다 데이터를 보며 작물 상태를 예측하고, 몸으로 밭을 돌며 잎의 색, 줄기의 탄력, 뿌리의 반응을 본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내 노력이 어디까지 닿았는지를 똑똑히 알게 된다. 내가 어제 뿌린 물이 부족했는지, 퇴비의 시점이 적절했는지, 햇빛이 너무 강했던 건 아닌지. 작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내 노력의 기록을 하나도 빠짐없이 ‘결과물’로 보여준다. 농사에서 ‘운’은 일부일 뿐이다. 대부분은 얼마나 꾸준히 손을 댔는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했는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에 따라 갈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부지런해지려 애쓴다. 작물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전에 한참 자신감이 넘칠 때, 실험 삼아 자동화 시스템만 믿고 한 주일간 하우스를 덜 돌았던 적이 있다. 결과는 참담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지만, 상추 잎 끝이 타들어가 있었고, 청경채는 수분 부족으로 속잎이 말라버렸다. 단 7일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작물은 스스로 증명해버렸다. ‘당신의 무관심은 고스란히 나의 생장으로 드러납니다.’ 그 경험 이후로 나는 절대 작물에서 눈을 떼지 않게 되었다. 매일 조금씩이라도, 내 손을 댄다는 것. 그것이 단순히 작업의 의미를 넘어서, 생명에 대한 책임이라는 걸 체감했다. 가끔 작물에 말을 건다. “오늘은 좀 기운이 없어 보이네?” “물을 너무 많이 줬나?” “햇빛이 강해서 미안하다.” 이런 말을 들은 작물이 대답을 하진 않지만, 이틀쯤 지나면 확실한 반응을 보여준다. 한 줄기 바질이 고개를 들면, 나는 안다. 어제 내가 준 미량요소가 맞았구나. 루꼴라의 잎이 넓고 두꺼워지면, ‘이 아이가 지금 잘 먹고 잘 자라고 있구나.’ 그런 순간이 쌓일수록 농사는 재미있어진다. 내가 돌린 하나의 물줄기, 조정한 한 번의 환기창, 감으로 뿌린 액비 한 스푼이 실제로 작물의 몸에 반응을 일으킨다는 것.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만족감이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이 이토록 물리적으로 실현되는 분야는 농업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농사에도 실패는 있다. 분명히 정성을 다했는데도 병해가 퍼지고, 날씨가 뒤엎고, 가격이 폭락하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프지만, 작물 탓은 할 수 없다. 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패는 나의 판단, 나의 방식, 나의 타이밍이 틀렸다는 신호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면서 나는 누구보다도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작물을 통해 나를 본다. 내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얼마나 민감하게 상황을 파악하는지, 얼마나 욕심을 부렸는지를. 거울처럼 작물은 내 태도를 비춘다. 거짓 없이,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오늘 수확한 상추는 특별히 향이 좋았다. 아침이슬을 머금은 잎을 하나하나 따면서 손끝에 전해지는 탄력에 감탄했다. 이 아이는 지난 한 달 동안 단 한 번도 내 손에서 멀어진 적이 없다. 물 조절, 양액 배합, 온도 체크, 환기 타이밍까지, 내가 모든 걸 기록하고 조율했다. 그 노력의 결과가 바로 이 잎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고객이 이 상추를 먹고 “향이 진하고 쌉쌀함이 덜해요”라고 말할 때, 나는 설명 대신 웃는다. 왜냐하면 나는 안다. 그 말이 내 노력의 결과라는 걸. 그 누구보다 내가 열심히 지켜본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농사는 가끔 외롭다. 들판 한가운데, 하우스 안에서 하루 종일 혼자 흙을 만지며 지내는 날도 많다. 하지만 그 속에서 나를 위로해주는 것은 작물이다. ‘당신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어요’라는 말을 잎사귀 하나가 대신해준다. 그래서 나는 이 일을 그만둘 수 없다. 이토록 정직하게, 그리고 분명하게 반응해주는 생명체를 키운다는 일은 다시 말해 나의 삶을 매일 검토받는 일이기도 하다. 작물은 절대 나를 속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 정직함 앞에서 나는 늘 겸손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