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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농기계 구입기 - 결정부터 후회까지의 감정 곡선

by 519kiki 2025. 5. 24.

오늘도 밭 한쪽에서 트랙터 시동을 걸었다. 이젠 손에 익어서 조작이 자연스럽고, 소리만 들어도 상태를 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이 농기계를 처음 샀던 순간을 떠올리면 지금도 심장이 살짝 뛴다. 그건 단순한 구매가 아니었다. 농부로서의 첫 투자였고, 동시에 내 선택을 스스로 증명해야 했던 아주 무거운 결심이었다. 처음 농사를 시작했을 때는 손으로 할 수 있는 건 다 손으로 했다. 삽을 들고, 쟁기를 밀고, 손으로 고랑을 타며 땅을 다졌다. 체력 하나 믿고 어떻게든 버텼다. 하지만 면적이 조금씩 넓어지고, 작물의 종류가 다양해지면서, 한계가 분명해졌다. 하루가 멀다 하고 허리가 아프고, 밤마다 팔이 저려 잠을 설쳤다. 그때 처음으로 ‘농기계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내 농사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출발점이 되었다.

밀-밭-수확하고-있는-트랙터-사진

 

문제는 종류가 너무 많았다는 거다. 트랙터만 해도 대형, 소형, 관리기 포함해 수십 가지 모델이 있었고, 가격은 물론 기능도 천차만별이었다. 중고로 살 것이냐, 새걸로 살 것이냐부터 고민이 시작됐고, 동네 농기계 센터를 몇 군데 돌고 나서야 대략적인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실제로 계약서에 사인하려는 순간 나는 심하게 망설였다. 이 기계를 내가 과연 충분히 다룰 수 있을까? 관리할 수 있을까? 이 돈이면 비닐하우스 하나 더 지을 수도 있고, 창고를 수리할 수도 있는데, 너무 큰 결정을 내리는 건 아닐까? ‘필요’와 ‘욕심’ 사이를 오가며 밤잠을 설쳤다. 그때 내 마음을 정리해준 건, 결국 내 몸이었다. 또 한 번 삽질을 하다가 허리를 삐끗한 날, 나는 고요히 혼잣말을 했다. “이제 도구가 필요할 때다. 몸 하나로는 오래 못 가.” 결정을 내리고 나니 후련했다. 작은 중고 트랙터 하나, 작업기 두 개, 그리고 관리기 한 대. 처음 시동을 걸던 날, 손이 떨렸다. 익숙지 않은 소리, 낯선 진동, 서툰 조작. 이게 ‘농부의 도구’라고 생각했지만, 그 순간 나는 도구가 아니라 ‘낯선 기계 앞에 선 초보자’일 뿐이었다. 하우스 앞 공터에서 몇 번을 연습하다가 논두렁에 빠뜨릴 뻔했고, 기계를 세우는 법도 몰라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때 들었던 후회는 생각보다 컸다. ‘내가 이걸 왜 샀지?’ ‘차라리 그 돈으로 사람을 썼으면 어땠을까?’ ‘괜한 사치였던 건 아닐까?’ 마을 어르신들 앞에서도 어색했고, 조작이 미숙한 내 모습을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자존심이 상했다. ‘농사 좀 해본다고 기계부터 샀다’는 시선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그래서 한동안은 기계를 밖에 꺼내놓지도 못했다.

 

하지만 사람도, 기계도 결국 ‘익숙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작스레 소나기가 내리고, 밭이 진창이 된 상황에서 손으로는 도저히 물 빼기를 할 수 없어 처음으로 관리기를 꺼냈다. 두려움을 억누르고 시동을 걸었고, 진흙 위를 무겁게 굴렀다. 그날 하루, 관리기로 고랑을 다시 정리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도구가 나를 도왔다’는 감정을 느꼈다. 그 이후로 작업 속도는 빨라졌고, 허리 통증은 줄었으며, 반복되는 노동의 피로도 확실히 덜해졌다. 그리고 점점 기계의 움직임에 익숙해졌고, 엔진 소리로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게 됐고, 오일이나 벨트 같은 소모품도 스스로 점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비로소 기계를 ‘내 손의 연장’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물론 지금도 어려운 점은 있다. 정비는 여전히 어렵고, 고장이 나면 부품 수급부터 비용까지 신경 쓸 게 많다. 특히 한창 바쁠 때 문제가 생기면 머리가 하얘진다. 그럴 때마다 ‘내가 기계에 의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기계는 단지 하나의 선택일 뿐이다. 농사를 짓는 주체는 여전히 나고, 기계는 그 선택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효율적으로 지속하게 해주는 조력자일 뿐이다. 이제는 내가 기계를 다루는 게 아니라, 기계와 함께 일하는 기분이 든다. 그 변화가 중요했다. 내 농사의 방식도, 내 노동의 무게도, 내 자존감도 조금씩 달라졌다. 후회가 없다고는 못 하겠다. 처음엔 분명 실수도 있었고, 과소비라는 말도 들었고, 쓸 줄도 모르면서 왜 샀냐는 핀잔도 받았다. 하지만 지금은 당당히 말할 수 있다. ‘그 선택은 내게 필요했고,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오늘도 해질 무렵, 트랙터를 세차하고 창고에 넣었다. 손에 묻은 기름 냄새를 닦으며 나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처음엔 불안과 후회로 시작했던 선택이 이제는 나의 일상과 완전히 스며들었다. 기계는 사람을 대신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의 삶을 조금 덜 아프게, 조금 더 오래 가게 도와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도움을 받아 땅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내 손은 여전히 흙으로 거칠고, 어깨는 무겁지만, 마음만은 가볍다. 농기계를 처음 샀던 그날의 두려움도, 지금은 추억이 되어 나를 웃게 한다. 그 곡선의 끝에는 언제나 ‘괜찮아졌다’는 문장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