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첫 수확을 했다. 봄부터 정성 들여 키운 상추와 청경채, 그리고 루꼴라까지, 드디어 손에 쥐게 되는 날이었다. 어쩌면 처음 농사를 시작했던 그 순간보다 더 떨리는 하루였는지도 모른다. 이른 새벽, 아직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시간에 농장으로 나왔다. 고요한 어둠 속에 하우스 문을 열 때의 긴장감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하우스 안은 은은한 습기와 토양 냄새가 어우러져 작은 세상을 이루고 있었다. 손전등을 켜고 천천히 작물 사이를 걸었다. 잎은 반짝였고, 아침 공기를 머금은 상추는 제 몸을 더 단단히 세운 것처럼 보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매일같이 돌본 아이들이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는 순간을 맞이하는 기분이었다. 손에 장갑을 끼고, 하나하나 잎을 따기 시작했다. 처음엔 망설여졌다. 혹시 잎을 다치게 하진 않을까, 뿌리를 상하게 하진 않을까. 하지만 이내 작물의 탄탄한 생명력을 느꼈다. 잘 자란 상추는 부드러우면서도 탄력이 있었고, 루꼴라는 특유의 향을 짙게 품었다. 따뜻한 손바닥 위에 하나 둘 쌓여가는 초록빛. 그 무게는 가벼웠지만, 마음은 묘하게 무거워졌다. 이 작은 잎들이 내 지난 몇 달을 증명해주는 것 같아서였다. 비오는 날, 바람 부는 날, 때로는 병충해를 걱정하며 잠 못 이루던 밤들도 모두 이 순간을 위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수확을 마치고 나서, 포장을 준비했다. 깨끗한 물에 살짝 헹구고, 바람으로 물기를 말리고, 작물 하나하나를 소중히 담았다. 투명한 포장지 너머로 보이는 초록색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이라도 되는 양. ‘아, 농사는 결국 기다림 끝에 오는 보답이구나.’ 가슴 깊은 곳에서 그런 생각이 일어났다. 처음 농장을 차릴 때는 매출과 생산성만 생각했었다. 빨리 심고 빨리 키워서 빨리 팔아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손안에 담긴 상추를 보며 알게 됐다. 농사는 시간이 쌓인 결과이고, 사랑이 담긴 기록이라는 것을. 트럭에 첫 상자들을 싣고 나서야 해가 완전히 떠올랐다. 햇살은 포장지 위로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손등에 맺힌 작은 흙자국조차 대견해 보였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예상치 못한 작은 문제가 찾아왔다. 배송지에 도착해 물품을 정리하는 중에, 일부 포장에서 상추가 살짝 상해버린 걸 발견한 것이다. 분명히 신선하게 포장했는데, 생각보다 하우스와 외부 온도 차이가 컸던 모양이다. 땀으로 젖은 손으로 포장을 닫을 때, 아마 미세한 수분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상추 잎 끝이 살짝 물러 있었고, 청경채는 잎이 눌린 자국이 보였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첫 출하, 첫 수확, 첫 판매. 그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마음 같아선 다시 전부 가져오고 싶었다. 다시 포장하고, 다시 닦고, 다시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시간이 촉박했다. 오전 중으로 납품을 마쳐야 했고, 그 일정은 나 혼자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숨을 깊게 내쉬고, 최대한 손상되지 않은 상품부터 선별해 다시 정리했다. 그리고 점주님께 솔직하게 말씀드렸다. “처음 납품이라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바로 연락 주세요.”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려 했지만, 마음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점주님은 상추를 만져보시더니 환하게 웃으셨다. “처음 치곤 아주 좋아요. 첫 납품 때 다 이래요.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 돌았다.
돌아오는 트럭 안, 허탈함과 안도감이 뒤섞였다. 분명 기쁜 날인데, 실패한 느낌이 더 크게 남았다. ‘왜 좀 더 꼼꼼히 하지 못했을까.’, ‘왜 수분 체크를 더 하지 않았을까.’ 온갖 자책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작은 실패가 앞으로 내 농사에 반드시 필요한 경험이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농사는 늘 그렇다. 매일 배우고, 매일 실수하고, 매일 다시 다듬는다. 어제의 실수 덕분에 오늘이 나아지고, 오늘의 실패 덕분에 내일이 성장한다. 나는 아직 농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많이 서툴다. 그렇지만 그 서툶을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을 용기를 배우는 게 농사의 본질임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농장으로 돌아와 다시 밭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이미 태양은 높이 떠서 땅을 데우고 있었다. 상추밭은 오늘도 조용히 숨 쉬고 있었다. 작물들은 나의 실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로지 자라기 위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실패를 모른다. 그저 살아내는 것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나도 그래야겠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작물처럼, 다시 하루를 시작하면 된다. 오늘의 수확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내게는 무엇보다 소중한 시작이었다. 첫 수확의 기쁨과, 예상치 못한 작은 실패. 이 두 가지가 오늘 하루를 온전히 채웠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됐다. 농부의 길은 수확의 환희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실패를 견디고 성장하는 수많은 조용한 날들로 짜여 있다는 걸. 흙을 다시 손에 쥐었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따뜻한 감촉이 위로처럼 전해졌다. 내일은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반드시 더 잘할 것이다. 그렇게 나는 또 다시 땅과 약속했다.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나겠다고,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농부가 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