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판매장을 찾은 소비자와 나눈 따뜻한 한마디

by 519kiki 2025. 5. 10.

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판매장에 도착했다. 매주 금요일은 내가 직접 납품도 하고, 판매장 앞에 작은 부스를 열어 작물에 대해 직접 설명하는 날이다. 농사만 짓는 것도 고되지만, 키운 작물을 누군가에게 ‘제발 사달라’는 마음으로 설명하는 일은 또 다른 에너지를 요구한다. 그래도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내 작물을 직접 만나는 소비자들의 얼굴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매번 긴장되지만, 그 긴장 속에서 얻는 따뜻한 한마디가 나를 다시 일어서게 만든다. 오늘도 그랬다. 부스를 세우고, 이른 아침에 따온 상추와 루꼴라, 바질, 청경채를 가지런히 놓았다. 투명한 용기에 들어간 채소들은 아직도 뿌리에 물기와 생기가 남아 있었다. 옆에 작은 손글씨 안내판을 세워두었다. “오늘 수확한 채소입니다. 논산 ○○농장에서 직접 키운 무농약 작물이에요.” 그리고 언제나처럼 작은 손편지 한 장도 함께 넣어뒀다. 진심을 전하려면 결국 말보다 손이 먼저여야 한다는 걸 알게 된 뒤부터는, 매번 몇 줄이라도 직접 글을 써 넣는다. 오늘은 이렇게 썼다. “이 채소를 먹는 당신의 하루가 조금 더 건강하고 따뜻해지길 바랍니다.”

고추-수확하는-사람-사진

하루는 평이하게 흘러가는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무심히 한 번씩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간혹 몇 명은 다가와 제품을 살펴봤다. 어떤 이들은 가격표만 보고 고개를 돌렸고, 또 어떤 이들은 무농약 인증 마크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깨에 힘을 주면서도 마음속으론 조마조마했다. 어쩌면 내 채소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아직도 나는 설명보다 표정을 먼저 읽는다. 소비자가 어떤 눈빛으로 채소를 보는지, 어떤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지를. 그렇게 소비자와의 눈빛이 오갈 때면, 작물 하나하나에 다시 마음이 간다. 단지 팔기 위한 작물이 아니라, 함께 숨 쉬고, 함께 자란 아이들이기에. 오후가 되어 해가 기울기 시작할 무렵, 한 중년 여성분이 부스 앞으로 조용히 다가왔다. 말없이 채소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더니, 내게 조용히 물었다. “이 상추, 직접 키우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네, 논산에서 스마트팜이랑 노지 혼합해서 직접 키웠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잠시 상추를 손에 들고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예전 저희 아버지가 키우시던 상추 냄새랑 같네요.”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기치 못한 공감의 한마디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고,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분은 잠시 더 서 있다가 상추 두 팩과 루꼴라 한 팩을 사시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이걸로 쌈밥 해 먹을게요.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그 한마디에 온몸이 따뜻해졌다.

 

누군가 내 작물을 먹는다는 건, 단지 상품이 거래되는 게 아니다. 누군가의 식탁에, 누군가의 저녁에, 내가 심은 씨앗 하나가 자리 잡는다는 뜻이다. 그것이 매번 이렇게 가슴 깊이 울릴 줄은 몰랐다. 특히 ‘아버지의 상추 냄새’라는 말은 내게도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나 역시 아버지를 떠올렸다. 어릴 적 여름 저녁, 마당 한쪽에서 따오던 상추의 냄새. 그것을 소금장에 찍어 고기 없이 밥을 싸 먹던 기억. 결국 농사란, 누군가의 기억과 다시 만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오늘 그 소비자의 한마디는 내게 그걸 다시 상기시켜주었다.

판매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트럭 안은 조용했지만 마음은 벅찼다. 하루종일 쌓인 피로가 여전했지만, 단 한 마디가 나를 일으켜 세우고 있었다. “잘 먹을게요. 감사합니다.” 누군가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인사일지 모르지만, 농사짓는 사람에게 그 말은 한 해의 수고를 감싸주는 보상이다. 이 채소가 헛되이 자란 게 아니라는 확인, 내가 해온 일이 누군가에게 의미가 있다는 위로. 그 말 한마디를 들으려고, 나는 오늘도 작물에 이름을 걸고, 손편지를 쓰고, 먼 길을 달려 판매장에 섰던 것이다. 농부는 작물과만 대화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작물을 먹을 사람과도 조용히 마음을 나누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손편지를 쓸 것이다. 내 작물이 자라온 이야기, 내가 얼마나 이 아이들을 아끼며 길러왔는지, 그리고 그걸 받아든 사람이 얼마나 소중한지. 작물을 건네는 동시에, 내 마음도 함께 전달되기를 바라면서. 소비자와 나눈 짧은 눈맞춤과 한마디가 이렇게 하루를 다 바꿔놓을 수 있다는 걸, 나는 오늘 또 배웠다. 이 한마디는 농사 기술로 배울 수 없고, 스마트팜 시스템으로도 감지되지 않는다. 오직 마음으로만 받을 수 있는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이, 내일 아침 내가 다시 밭으로 나가게 만드는 진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