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하우스를 정리하는 데만 하루가 다 갔다. 어젯밤, 예상보다 훨씬 많은 비가 쏟아졌다. 뉴스에서는 한 시간 강우량 80mm를 넘긴다 했고, 동네 단톡방도 긴급하게 울렸다. 나도 자정 무렵까지 하우스 안을 확인하고, 배수로를 다시 파고, 물이 넘치지 않게 모래주머니를 배치했다. 하지만 새벽 두 시를 넘어서면서 비는 말 그대로 하늘이 터진 것처럼 내렸다. 천둥까지 겹쳐 잠도 잘 수 없었고, 속수무책으로 하우스를 바라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느낀 감정은 두려움이 아니라, 무력감이었다. 아무리 내가 애써도 자연 앞에서는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도 어딘가 믿고 싶었다. ‘설마 여기까진 안 오겠지. 이번엔 버텨주겠지.’
하지만 아침이 되자, 그 ‘설마’는 현실이 되었다. 하우스 앞 둔덕이 무너졌고, 일부 고랑은 완전히 잠겼으며, 작물의 절반가량은 흙탕물에 덮였다. 바질은 잎 끝이 물러져 있었고, 상추는 잎이 눌려 숨을 쉬지 못했다. 특히 며칠 뒤 수확 예정이었던 청경채는 완전히 흙에 잠겨 잎 끝이 갈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온몸의 힘이 빠졌다. 한 계절을 걸고 키워온 작물들이 단 하룻밤 만에 망가지는 걸 보며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손도 발도 움직이지 않았고, 머리 속은 텅 빈 느낌이었다. 마치 누군가 뒤에서 등을 미는 것처럼 휘청였다. 이게 농부의 숙명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 현실 앞에선 여전히 아프고 절망스럽다. 주저앉아 흙을 만지며 속으로 되뇌었다. “이건 진짜 아니잖아. 이렇게 끝나는 거야?” 그런데 그때, 하우스 저편에서 한 포기의 루꼴라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게 보였다. 놀랍게도 물이 고인 한가운데, 잎이 물에 젖어 있음에도 중심 줄기가 꼿꼿이 서 있었다. 믿기지 않아 가까이 가서 손으로 만져봤다. 분명히 물에 잠겼던 작물인데, 잎이 여전히 생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눈물이 났다. 아주 작고 연약해 보이던 한 줄기 식물이, 이렇게 큰 자연의 위협 앞에서도 살아남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마음속에 ‘끝났다’는 말 대신 ‘아직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망가진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그때부터 마음을 다잡기 시작했다. 우선 물 빠짐이 늦은 곳을 중심으로 배수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고랑을 다시 긁어내고, 진흙을 퍼내며 물길을 바꿨다. 작업 중에 손은 미끄러지고, 흙이 신발 속까지 들어왔지만 이상하게 힘이 났다. 그 작은 루꼴라 덕분이었다. 마치 “당신만 포기하지 않으면, 나도 버틸게요”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작물은 언제나 말이 없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전해지는 힘은 때로 어떤 위로보다 강하다. 나는 하루 종일 그 힘을 붙들고 움직였다. 망연자실했던 새벽의 나는 점점 사라지고, 다시 작물의 옆에 서 있는 농부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우스 한쪽은 완전히 폐기해야 했다. 진흙이 너무 깊이 침투했고, 뿌리까지 썩은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반대편은 다행히도 약간의 손상만 입었고, 손질을 잘하면 회복이 가능해 보였다. 그렇게 하나하나 살펴보며 생존 가능한 작물과 불가능한 작물을 분리하고, 주변 정리를 하다 보니 해가 저물었다. 손은 부르터 있었고, 허리는 아팠지만, 마음속에는 이상하게도 평온함이 있었다. 폭우는 많은 걸 쓸고 갔지만, 전부를 앗아간 건 아니었다. 남은 것들이 있었고, 그 남은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니 절망이 아니라 책임감이 생겼다. 이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면, 이번 계절도 의미 없지는 않겠다는 믿음. 집에 돌아와서, 하루 종일 젖은 장화를 벗고 샤워를 하며 거울을 봤다. 얼굴은 탔고, 눈 밑은 피곤으로 꺼져 있었지만, 눈동자엔 다시 생기가 있었다. 농사는 어쩌면 이런 과정을 통해 ‘희망의 감각’을 훈련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포기할 이유가 너무 많지만, 끝내 포기하지 않기 위해 나 자신을 계속 붙잡는 일. 그것이 농사의 본질이라는 걸 이번 폭우로 다시 배웠다. 무너진 땅 위에도 다시 씨를 뿌릴 수 있다는 걸. 잃은 것보다 남은 것에 집중하는 힘을 가진 사람이 진짜 농부라는 걸. 내일은 본격적인 복구 작업을 시작한다. 진흙을 걷어내고, 작물 상태를 기록하고, 다시 작형을 설계할 것이다. 아마 시간도 들고, 돈도 들고, 노동도 몇 배는 더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그 일에 임할 수 있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나는 오늘 루꼴라 한 줄기에게서 희망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주 작은 존재가 큰 무너짐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서 있는 걸 보며, 나 역시 그렇게 서 있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폭우가 지나간 자리에서, 나는 다시 씨를 품는다. 그리고 내일의 햇살을 기다린다.